창경궁 문정전 앞뜰에 뒤주가 놓여있다.
왕은 아들에게 칼로 자결하라하였지만, 시강원 관료들의 만류로 뒤주로 들어가라한다.
"내가 죽으면 300년 종묘사직이 망하고, 네가 죽으면 종묘사직은 보존할 수 있을것이다.
어서 들어가지 않고 뭣하는것이냐!"
세손이 와서 울부짖으며 용서를 바랐지만, 세손도 군사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는 결국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세자는 폐서인이 되었고, 뒤주 밖에서 그는 뒤주를 지키는 병사들의 희롱을 참아내야했다.
"배고프지않느냐? 너에게 떡을 주랴, 술을 주랴? 낄낄낄..."

그 후로 8일, 물조차 입에 담을 수 없었던 세자, 아니 그는
그렇게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나이 28세, 후에 왕이 되는 세손 이산은 11세였다.

  

위에서 보셨던 것처럼, 우리 역사에서 아들을 뒤주에 가둬죽이는 파격적인 사건을 보여줬던 영조.

 

왜 영조는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요??

 

 

그러기 위해선 숙종의 세자인 경종의 이야기부터 해야합니다.

경종은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의 소생입니다. 장희빈은 남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있던 인물이었죠.

서인의 지지는 잘알다시피 인현왕후 민씨에게 집중되어있었습니다. 헌데 왕후 민씨는 적출도 생산하지못했고, 장희빈의 모략으로 폐서인되어 쫓겨납니다. 결국 궁궐 안에는 중궁전에 까지 남인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되게되고, 결국 숙종은 남인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역으로 서인을 칩니다. 경신년에 그랬듯, 이번에도 많은 인명들이 죽어나게생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입니다.

여기서 경신환국 얘기를 안할 수 없네요. 남인출신 영의정 허적의 손자인 허견의 역모논의가 발각되어 남인들을 대거 숙청한 사건입니다.
결국 정권은 서인으로 넘어가게됩니다만, 남인의 최종처리를 놓고 선처해주자는 '소론'과 아예 뿌리뽑자는 '노론'으로 나뉩니다.
어찌 되었든, 다시  기사환국으로 돌아와서, 이번엔 남인들이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경종)를 등에 업고 서인들이 대거 숙청됩니다.
이로 인해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사약을 받게되고, 우두머리를 잃은 패거리들은 흩어지기마련이듯, 서인들도 재기불능상태가 되어버리죠.
이제 서인에게 남은 것은 불타오르는 복수심과 남인에 대한 뼈저린 증오심뿐입니다. 또한 남인의 빽으로 장희빈을 둔 아무 죄없는 경종에게까지 그 증오심은 대단했는데 특히 강경파인 노론의 증오심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렇게 서인들은 칼을 갈아 마지막 반격을 준비합니다.

당시 왕이었던 숙종은 한때 장희빈을 총애하여 세자까지 출산하였으나, 그 하는짓이 매우 오만하고 방자해지는지라 현모양처였던 인현왕후 민씨를 그리워한다 이겁니다(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어찌되었든 이런 정황과 맞물려 서인은 '폐비 민씨를 복위하자!'는 운동을 벌이게되는데요.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위한 남인에 의해 복위운동을 주장한 사람과 그와 연관된  사람들은 모두 죽게됩니다.

헌데 숙종은 그 남인의 처사가 맘에 들지않아 복위사건을 담당한 남인들을 유배보내고 소론과 노론계층을 재등용하게됩니다.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입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중전이었던 장씨는 희빈 장씨로 격하되었고, 폐서인되었던 왕후 민씨는 다시 환궁하게됩니다. 또한, 기사환국 때 죽은 송시열에게 도로 작위를 내려줍니다.

 

이렇게 남인이 재기불능상태가 되어 조정이 편안하게되는가하니, 그것 또한 아니라는겁니다.
같은 어미에서 나왔지만 그 정치적 성향이 너무 다른 두 아들들때문인데요. 장남 노론과 차남 소론이 걸핏하면 싸움질을 한다이거죠.
옷차림새로도 노론과 소론을 구별하게 되는데요.  노론은 저고리깃과 섶을 둥글게접었고 소론은 모나게접었다나요?
어찌 되었든, 이 둘도 결국 적으로 돌아서게되는데요. 남인의 자리에 소론이 대신하게됩니다.

긴 재위기간 끝에 숙종이 세상을 뜹니다. 그에 따라 세자인 경종이 왕위에 오릅니다만,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는 장면을 그대로 본 세자는 그 후부터 기를 못펴고 비실비실해집니다.
일설에서처럼 장씨가 세자의 하초(생식기)를 세게잡아 그것이 불능한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만,

경종은 애초부터 '남인'이라는 당적을 달고 태어났는지라, 노론의 핍박이 대단했다고합니다.

경종의 집권 초반기 때부터 후사가 없다며 경종의 아우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라고 온갖 술수를 다 씁니다(심지어 협박까지도요).

 

노론은 이렇게 처음부터 연잉군을 편들고,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는 형세가 되버린거죠.
왕세제 책봉에 대해서도 경종이 윤허하였을때는 소론이, 경종이 입장을 철회했을 때는 노론이 벌때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팽팽한 대립 와중에 '임인옥사'가 터집니다. 노론세력이 경종을 상급수(자객을 써 죽이는것)를 써서 경종을 시해하려하였단 겁니다.
그와 관련된 노론의 문건에는 그 수괴로 '연잉군'이 떡하니 기재되어있었다고합니다.
정상적인 왕조시스템 하에서는 보통 역모사건에는 왕자들이 연루되고, 그 왕자들은 가차없이 죽게되는데 연잉군은 예외였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경종의 후사문제때문이죠. 경종은 아이를 낳지못했고, 형제라곤 연잉군이 하나밖에 없었으니말이지요.
이렇게, 아들 적게낳은 아버지덕택에(?) 목숨까지 부지하게된 왕세제 연잉군...

1724년, 왕위 계승 1순위였던 왕세제 연잉군이 드디어 왕위에 오르게됩니다.

처음부터 노론의 입김과 지지로 왕위에 오른 영조, 노론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니 영조는 걱정이 앞섭니다.
'저놈들이 저러다가 나도 마음에 안들면 갈아치우겠지?'

이렇게해서 실시된것이 바로 "탕평책"인데요. 이는 숙종 때 처음 제기되어 실시하였으나, 숙종의 편당적인 인사관리로 인해 사람들만 죽어나고 흐지부지되었던 정책입니다.

영조는 정부 각 요직에 서로 다른당의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는데요. 예를 들자면 영의정엔 노론, 좌의정엔 소론, 병조판서 소론, 병조참판 노론...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영조의 탕평책을 '완론'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아예 탕평책과 왕권의 신장을 지지하는 탕평파를 만들어서 당파싸움을 일시적으로 눌러놓는거죠.

헌데, 이러한 영조의 피와 땀이 서린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게되는데...

 

집권 초 영조의 피나는 초당적 탕평책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든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인좌'라는 사람되겠다.
이 '이인좌'.. 한 명만이 물을 흐려놓은 것이 아니라, 소론 전체의 공모로 인해 훗날 사도세자의 비극이 시작되니...
전편에서도 보았듯, 영조는 탕평책에 대한 강력한 의지로 집권 4년차를 보내고 있을 무렵, 경상도에서 난이 터진다.

이것이 "이인좌의 난"이라는 것인데, 골자를 살펴보니 노론이 영조를 왕위에 올리자 불안해졌던 소론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도 다소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결국 난이 평정되어 영남에 들어가는 어귀에 '평영남비(平嶺南碑-영남을 평정을 하였단 기록을 적은 비석-)을 세우게된다.

영조는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론이 불온한 마음을 품자 분노했다. 이로 인해 소론은 영조와 노론의 기에 눌려 기를 펴지못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7년이 흐르고,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로부터 사내아기가 태어나니 이가 바로 사도세자되시겠다.
1735년이면 영조의 나이 41세에 얻은 아들이 영특하고 총애하였던지라 태어난지 1년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던 것이다.
10살에는 여성궁중문학의 대가라고 알려진 혜경궁 홍씨와 결혼하였다.

이렇게 총애하는 아들의 공부를 책임지는 관원들이 소론출신이었다는 것을 보면 영조는 탕평책에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었나보다(헌데 이것이 부메랑이 되서 뒤퉁수를 칠줄이야?!).
여하튼, 이 10살의 나이에 소론출신의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니, 머리에 들어올 것은 뻔할 뻔자인지라.

바로 경종집권기에 연잉군(현재의 영조)의 왕세제 책봉을 둘러싼 소론과 노론의 권력다툼이었던 신축년에서 임인년까지 이어졌던 신임옥사의 판결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잠시 또 경종의 집권기로 돌아가자면, 먼저 신축옥사를 보자.

신축년, 1721년이다.  소위 노론 4대신이라 불리운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등이 영조의 왕세제 책봉을 강권하여 왕세제를 책봉하긴하였으나 소론에서 조태구, 유봉휘에 의해 이에 대한 부당성을 고하는 상소가 빗발치자 영조를 왕세제로 세웠던 4명의 대신들을 죽여버린것이 바로 신축옥사였다(반대도 보통 반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까지 죽인걸 보면..)

그 사이에 경종의 후사가 태어났다면 좋으련만, 임인년(1722년)이 되어도 후사소식은 감감무소식이라.
결국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여 정무를 돌보게하는데...
소론 출신의 목호룡과 김일경 등이 경종을 죽이려는 암살기도가 있다며 노론 60명을 잡아들여 심문하였다.
헌데 이 심문을 담당했던 당파가 바로 남인이라, 노론이 소론과 남인들이 정권을 잃어 왕세제를 모함하는 것이라는 외침은 들은 척도 하지않더라... 결국 이들도 세상을 등지고말았던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소론과 남인의 최종적승리라고 볼 수 있으나, 영조가 즉위하자 때는 이때다싶은 노론의 상소로 인하여 신축&임인옥사는 무고로 밝혀져 김일경과 목호룡이 잡히게 된다. 그로부터 얼마 있지않아 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신임옥사 이후 잠깐동안의 소론 집권기는 막을 내리게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그 뜻을 알수있다고 한 것처럼, 최종판결에서 노론이 이겨버렸으니 소론으로서는 원통할만도하다.

여튼, 다시 왕세자의 공부얘기로 돌아와서...
이 소론들이 불과 10살밖에 안되는 왕세자에게 신임옥사의 판결이 잘못되었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걸 들었으니, 어린 세자의 가슴에 당연히
'노론은 나쁘다'라는 의식이 잠재적으로 형성되었을 것을 물론이다.
그걸 마음속에만 담고있으면 좋으련만, 신임옥사의 판결이 잘못되었다며 직접적으로 노론을 비판하고만것이다!!

이로 인해 사도세자는 불과 10살의 나이에 노론에 의해 위험인물로 지목되는데....
세자가 자라면 자랄수록 노론은 불안하기만하다. 불과 10살부터 자신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꾸짖는 판이니
만약에라도 세자가 후일 보위에 오른다면 자신들의 관직은 물론, 심지어 목숨까지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한편으로는 두렵고, 세자가 밉기도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나날이 반감과 증오심을 키워갈 무렵, 아버지 영조는 새로이 계비(새로운 왕후)를 들이게되니,

이가 바로 MBC사극에서 악명을 떨쳤던 정순왕후 김씨되시겠다. 열다섯의 꽃다운 나이에 환갑이 6년이나 지난 할아버지에게 시집오는 그녀의 심정도 참 착잡이야했겠지만, 사내대장부 못지않은 권력욕을 갖고있었던지 여튼 가례를 올리고 내명부와 외명부의 수장이 된다. 1759년의 일이다.

가만! 이때 사도세자의 나이가 24살이니 허, 명색이 새어머니라지만 어머니보다 9살이 많은 셈이다... 이거야 원...

(후일 이 경사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를줄 영조는 알았겠는가...!)

여기서 정순왕후 김씨의 출신을 살펴보아야한다. 정순왕후 김씨의 아버지는 김한구, 인조 집권기 당시 소현세자의 세자빈인 강빈(姜嬪)의 목숨을 구명하다 사형당한 김홍욱의 현손이다. 어찌되었든간에 이 김한구와 정순왕후 김씨가 속한 경주김씨가문은 대표적인 노론 강경파로서 어찌보면 영조의 형인 경종처럼 정순왕후도 자라면서 '노론'의 색깔에 점차 물이 들여졌을 것이다.

사도세자를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노론의 기류와 함께, 노론강경파의 딸이 왕후로 들어온 시기는 천우신조라 할만큼 찰떡궁합이었다.

이렇듯, 노론과 정순왕후는 걸핏하면 동궁의 사소한 실수 하나라도 과대포장하여 '동궁의 행실이 이상하옵니다','동궁의 흠이 만 백성에게 알려질까 심려되옵니다' 아마도 이따위 말들을 해가며 영조의 마음까지 돌려놓는 판에 이른다.

결국 영조도 아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음은 말하면 입이 아플 이치가 된 것이다. 사소한 잘못 하나에도 꾸중은 무지막지할 정도로 들었을지도 모를일이지만... 아무튼 이 영특하고 총명한 사도세자, 거의 광인(狂人)이 되어간다.

궁궐 안에서 칼부림을 하여 궁녀를 죽이는가하면, 몰래 궁궐을 빠져나가 평양으로 유람을 갔다온다던지 정상적인 정신으로는 할 수없는 행위를 서슴지않고하게되는 지경에 이른다.

1762년 임오년, 꽃이 피면 지는 법이듯이 이 해에는 유독 꽃이 많이 졌다고하던가....

노론강경파의 대표주자 김한구와 그의 수하 격인 홍계희와 윤급 등은 사도세자의 장인 집안인 홍씨집안(대표적으로 홍인한)의 권세가 막강해지자 세자를 누름으로써 홍씨집안의 권세를 붕괴시키려는 수작으로 '나경언'이라는 사람에게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영조에게 올리고야마는것이다.

이 일로 나경언은 사형에 처해지고, 영조는 세자를 불러 조목조목 꾸짖기에 이른다.

결론은 칼로 목숨을 끊으라는 것이었으나 시강원 신하들의 만류로 자결은 거두게되나, 폐서인에 처해지고 뒤주에 갇히게된다.

그 후로 8일... 폐서인이라는 불명예와 병사들의 희롱의 치욕속에 물 한방울조차 입에 대지못한 비운의 세자 이선(李煊-사도세자의 본명-)은 28세의 나이로 세상에 이별을 고하게되는 것이다.

후일 왕이 되는 세손 이산은 11세의 나이로 임오화변의 현장을 목도하게되니 이 또한 후일 피바람의 뿌리가 된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풀이해보자면 이렇다. 영조를 지지하여 왕위에 등극시켜준 것으로 권력과 부를 지속적으로 누리려는 노론의 행보와,

영조는 이미 노론의 빽으로 인해 왕이 되었으니 세자에게라도 희망을 걸어 노론 중심의 정국을 깨보려는 소론의 책략이 충돌한 것이

바로 '임오화변'이라 할 수 있다.

결과는 4천 8백만 국민이 모두 아는대로 소론의 희망이었던 세자가 뒤주에 갇힘으로써 종결이 나게 되는 것이지만,

이제는 당()이 왕을 결정하는 택군론이 판을 치고, 그 당에 반대하는 의견을 편 사람은 그가 심지어 왕세자라 할지라도 죽임을 당하는

비정상적인 시스템으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돌아가고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은 단순히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미친짓이 아니라 그 이면에 권력을 두고 쟁투하는 당쟁의 뿌리에 의해 기인했다는 점에서 한층 더 비극을 주고있다...-



 


세월은 흘러흘러 조선시대 최장기간동안 보위에 있었던 영조가 죽기 1년 전인 1775년이다.

 

그동안의 일을 살펴보자면,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뒤 세손을 효장세자(영조의 차장자)의 호적에 입적시켜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한편 세손에게 기대를 걸었고 세손은 그 기대에 맞게 행동거지를 바르게하여 영조의 신임을 듬뿍듬뿍 얻게된다.

허나 이놈의 노론은 자꾸자꾸 손이 가는 어느 과자의 선전문구마냥 피맛을 한번보더니 그 피를 계속 원하더라 이 말씀이다...

 그 대상이 이젠 세손이다(허 참 요놈들 보게!). 어찌 되었든 세손이 그 때 11살이었으니 아무런 힘이 없음은 물론이다.
허니 영조가 세손의 정통성을 발빠르게 보장해주었던 것이다.
아무튼, 영조가 죽기 3개월전까지 14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다시 돌아와서 1775년, 영조는 나이가 많고 건강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게된다.

헌데, 홍인한(정조의 외삼촌)이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을 내세우니 그 내용은 감히 영조의 앞은 물론 세손의 앞에서도 지껄이기 발칙한 내용이니 분노는 하지말고 한번 살펴나보자.

"동궁은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사오며, 이조와 병조의 판서가 누구인지 알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이옵고, 조정의 일은 알 필요가 없사옵니다."

 허! 가관이로다! 어찌되었든, 이 내용이 담고있는 것이 뭣인가하니 세손의 무능함과 나아가서는 세손의 즉위를 극력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깟 대신 정치하는 거 가지고 무슨 법석이냐? 라고 말하신다면 오산이다.

영조의 나이 이때 벌써 81세, 당시 조선의 평균연령을 2배가량을 더 사신 고령 중의 최고령이다. 허니 만약 세손이 대리청정의 하교를 받고 대리청정을 하다가 영조가 사망하기라도하면 누가 말릴 것도 없이 대리청정하던 세손의 즉위는 국법으로서 정해져있던 것이니 노론으로서는 당연히 막아야하는 것이지만, 명색이 외삼촌되는 자가 자신의 권세와 목숨을 위해 조카의 즉위를 막고있는 노릇이라니?! 역사의 아이러니일세, 아이러니야... 

 

어찌되었든 홍인한이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다는 왕의 전교를 사관에게조차 적지못하게하고 "있을 수 없는 전교(殿敎-왕의 명령,지시-)"

라는 것은 거의 반란에 준하는 것이었으나 세손이 "나중에 사양상소라도 올려야하니 몇 자라도 적어두도록하자"라고하여 홍인한과의 마찰은

매듭을 맺었으나 영조는 더 강력한 수를 둔다. 아마도 홍인한의 강력한 반대였으리라.

 

그것은 바로 세손에게 군사를 준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순감군(巡鑑軍)'을 수점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죽을날이 얼마 남지않았으니 군사라도 손에 쥐어 반대파에게 초강수를 둔 것이다. 영조의 입에서 "동궁에게 순감군을 수점하는것은 300년 고사이니 군사를 정시(正時)에 불러들인다"라는 말까지 나오자 이제야 사태파악이 되었던지 대신들은 '전례가 있음을 들었으니 어찌 감히 반대하오리까'하고 물러났다고한다.

 세손에게 힘을 실어줬던 사람은 다름아닌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던, 할아버지 영조였던 것이다.
그렇게 생애 마지막 불씨를 태우고나서 자신의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82세의 고령 영조는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였다.
그 영조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알아차렸던지 즉위식에서 세손, 아니 전하께서는 옥좌에 앉기 전까지 수많은 눈물을 쏟으셨다고한다...

그렇게 즉위를 하고난 뒤 대신들과의 첫 상참자리에서 정조는 폭탄발언을 하고야만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오."

짧디짧은 한마디였지만 노론 대신들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영조가 세손에게 순감군을 수점한다는 것보다 더...
정조의 가슴 속에서 늘 하고싶었던 한 마디, 그 말이 임오화변(1762년) 이후 14년만에 입에 오른 것이다...
즉위 초부터 영조 말년기까지 거의 금기시되오던 "사도세자"라는 말을 꺼낸 정조...

아차! 깜빡하기 전에 짚고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사도세자에서 이 '사도'... 정의의 사도 슈퍼맨할 때 그 사도가 아니라
"말그대로 슬프게(-슬퍼할 도-) 생각한다(-생각할 사-)"라는 의미에서 내려진 칭호이다.

헌데 이 "사도"라는 시호는 정조가 붙였느냐? 아니다. 그건 다름아닌 영조가 붙인 것이다.
아니, 자기가 죽여놓고는 또 슬프게 생각한다니?? 변덕이냐? 가식이냐?!
물론, 변덕도 가식도 아니다. 당파의 격쟁 속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어찌보면 나약한 아비의 궤변이라고나할까?
무튼, 이 영조도 나이 마흔하나에본 아들을 죽이려니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조치한 것이 그나마 내가 슬프게 생각한단 것쯤은 기억해다오...라는 셈으로 붙여준 "사도"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던 것이다.

이같은 배경으로 인해 정조는 영조의 의도를 간파하고 즉위 1년차인 1777년에 사도세자에서 "장헌(莊獻)세자"로 추존하고
그의 사당으로 지금의 서울대병원 쪽에 '경모궁'을 지었으며 그 묘를 '영우원'으로 개칭하였던 배경이 될 수있었다.

그것말고 정작 중요한건 따로있으니, 바로 "금등(金燈)"이다. MBC에서 '이산'이란 사극을 보신분들은 기억할게다.

금등의 유래는 중국 주나라가 그 시초인데, 주나라의 무왕이 병환이 심하여 오늘내일하는 형세였다고 한다.
헌데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뜻이 맞으면 의형제라도 맺는, 그런 의리가 중한 나라가 아니던가?!
더군다나 친형제는 말하면 입이 아플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런 무왕의 동생인 주공이 형 대신 자기를 데려가라고 쓴 글을 상자에 넣어 쇠줄(금등)에 봉했다고한다. 그러자 바로 그 다음날 무왕의 병은 씻은듯이 낳게되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 바로 이 '금등'이다.

결국 이 금등의 의미는 무엇인고하니, 바로 신하가 왕을 위해서 목숨을 아까워하지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금등의 고사를 사도세자의 죽음에 빗대어 금등문서를 써서 끝까지 사도세자의 폐위와 죽음에 반대했던 채제공에게 남겼다하니,  한편으론 영조가 밉기도하면서 가슴 한구석이 아련하기도하다.

어찌되었든 이 금등문서의 작성연도가 분명하진 않으나 정조 17년(1793)에 이 금등문서의 일부를 공개하였다고하는데 그 내용은...

[피묻은 적삼이여 피묻은 적삼이여, 동()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란다]

2007년이던가? CGV에서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에서 이 금등문서의 내용이 나왔던것으로 기억한다.

이 금등문서를 공개하기 전까지 노론대신들은 물론이요, 다른 당파의 대신들까지도 영조가 사도세자가 단지 괘씸해서였다고만 알고있는 사람들은 물론 그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과 세자를 생전에 모셨던 전직 관료들에게는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위와 같이, 임오화변 이후 영조의 행보는 세자에 대한 참회와 후회, 그리고 권력에 대한 무상함으로 일관되었을 일일지도 모를일이나,
아무튼 영조의 이러한 조치들은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엄청난 효심을 보여주는 커다란 배경이 되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결국, 정조의 즉위에서부터 정조 집권기 내내 이뤄졌던 잦은 화성에의 참배를 겸한 행차는 영조의 조치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만약에 영조가 인조같이 졸렬하고 속좁은 왕이었다면 그 아들인 세손이 왕위에 올랐을 일은 발생하지도않았지만
영조는 경종집권기 때부터 쌓아온 처세술로서 세손을 보호하여주었던 것이 정조의 왕권강화에 이바지했던 면이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겠다.

마치 여의주가 있어야만 진정한 용처럼 느껴지듯이말이다... 

 

*[출처] 영조는 왜 사도세자를 죽일 수 밖에 없었나? <에필로그> - 마지막편, 용, 여의주를 물다..|작성자 대붕역풍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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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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